[ 천천히 휴식 ] - 090412

어느날 아침 일찍 거실에 앉아 있는데 계속 이상한 소리가 난다. 왠지 새소리 비스무레한 구구구구 소리. 설마 하면서 블라인드를 살짝 들어보니, 역시나 비둘기 한 마리가 배회중이다. 내가 동물을 끌어모으는건가, 수많은 집이 근처에 있지만 꼭 우리 집 앞에 와서 종종 놀고 있네; 그렇다고 빵 부스러기 같은 것을 깔아 준적도 없는데-_-

그래 어쩌면 이게 여유다. 잠시 휴식기이면서, 한 가지의 일만 할 수 있는 기간. 항상 두 가지 이상의 복잡한 일들에 연루(?)되어 정신없었는데, 다 정리하고 여유있게 한가지 일에만 참여하게 되어 한 숨 돌린 타이밍.

전투적으로 살고 싶지 않다. 천천히, 천천히, 즐길 수 있는 것들은 즐기면서, 욕심내지 않고, 유유자적하며 내가 해야 할 일들은 부지런히 하면서 지내고 싶다. 친구로부터 우연히 알게되어 구입했던 책 "조화로운 삶", 이제서야 제대로 읽어봐야겠다.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하루는 홍대에서 회사 동기들을 만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LG팰리스의 편의점 앞 길거리 포장마차 분식집 골목을 지나왔다. 한 때 거의 매일같이 들르던 떡볶이집이 있었는데, 우연히 생각나서 튀김 1인분을 먹으러 들어가게 되었다. 6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그 자리에서 떡볶이와 튀김을 만들고, 순대를 썰고 계시는 아주머니를 만났다. 어머니 연배 정도인 아주머니는 내가 보기에도 눈가에 주름이 잔뜩 늘어있었다. 오랜만에 반가워하며 아는척 몇년만에 인사했는데, 사실 잘 기억하셨는지, 못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어디 외국에 다녀왔느냐며 오랜만이냐고 하시고, 여전히 떡볶이 국물 듬뿍 담아 튀김을 주셨다. 남김없이 먹을 것들을 해치우고,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향했다. 뭔가 아쉬운 마음에 발길을 돌려 편의점행, 주머니에 남은 동전들을 주섬주섬 모아 몇백원짜리 캔커피 하나를 사서 다시 떡볶이집에 찾아갔다. 추운데 이거라도 드시라고, 담에 또 오겠다고 인사했더니, 덥썩 손을 잡으시면서 고맙다고 잘 지내라고 인사하신다. 분명 나를 기억하고 계셨던 것 같다. 다만 바빠서 처음에는 면식있는 인사를 못해주신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고 짝사랑하는 빵집 아가씨한테 꽃다발 선물하고 부끄러워 도망치는 마냥, 멋적어서 부리나케 집으로 향했다. 이런게 사람 사는거 아닐까.

3년 뒤에 다시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도, 그 자리에 건강하게 계시길. 제가 떡볶이 먹으러 갑니다.


이희승 :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비둘기' 가 떠오르는군 ㅋ (1001241810) x
lono : 섬유 유연제 생각도...-_-a (1001241810) x
likeblue : 확실히 아줌마들한테 강해--; (1001241810) x
lono : 또 뭘 ... -_-a (1001241810) x
lono.pe.kr from 2001.04.24 by lo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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